윤황선생은 본관은 파평인이고 자는 덕요(德耀), 호는 팔송(八松)이다. 27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사헌부감찰, 영광군수, 전주부윤,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. 숙종 36년(1710) 영의정의 증직과 다음해 6월에 문정공(文正公)의 시호를 받았다. 재실의 건축연대는 재실의 상량문을 통하여 보면 현종 6년(1665)에 안채를 짓고 숙종 21년(1695)에 문간채와 동재, 서재를 건축한 것을 알 수 있다 집의 구조는 “ㅡ”자형의 사랑채와 별도 떨어진 “ㄱ”자형의 안채와 문간채 및 서재가 있어 전체적인 구조는 “ㅁ"자형으로 되어 있다. 간결한 민도리집이며, 부연이 없는 홑처마로 중부지방 건축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. 재실 뒤편으로 선생의 묘소가 있으며, 약 300m 지점에 윤황선생의 고택과 사당이 있어 윤황선생과 관련된 유적이 밀집되어 있다.